우리가 몰랐던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진짜 얼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자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건립에 헌신한 성재 이시영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의 '세 가지 눈물'을 통해 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린다. 서울시는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이회영기념관'에서 이시영 선생 서거 이후 최초로 마련되는 특별전 '세 가지 눈물- 성재 이시영'을 내년 3월 1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20주년과 광복 8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해를 맞아,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에서 독립투사로, 그리고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동기 한복판을 살았던 그의 숭고한 삶과 고뇌를 되짚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전시의 첫 번째 주제 '대한제국의 눈물: 오호통재'는 한 명의 충신으로서 망국의 비운을 막지 못했던 이시영의 절통한 심정을 다룬다. 그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로서 일제가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며 항거의 뜻을 담은 '대소위신조약변명서'를 올렸으나, 끝내 국운이 기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때 그가 흘린 눈물은 나라를 잃은 슬픔과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담긴 '항거의 눈물'이었다. 결국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완전히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그는 형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와 함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전 재산을 처분해 서간도로 망명, 독립운동의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결단을 내린다.

 


두 번째 주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눈물: 낡은 중절모의 눈물'은 기나긴 망명 생활과 독립 투쟁 속에서 겪어야 했던 개인적인 비애를 조명한다. 서간도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군을 길러내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등 핵심 요직을 역임하며 궂은일을 도맡았던 그다. 하지만 그 영광의 이면에는 혹독한 시련이 있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망명했던 가족들마저 잃고 홀로 남겨진 것이다. 1945년 11월,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비행장에 섰을 때 그가 흘린 눈물은 해방된 조국을 밟는 감격과, 함께 돌아오지 못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인 '회한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주제 '대한민국의 눈물: 청년들 앞에 흘린 눈물'은 신생 국가의 지도자로서 그가 보여준 무한한 책임감과 고뇌를 다룬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국민들의 추앙을 받으며 초대 부통령에 올랐지만, 그의 앞에는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1년, 군 보급비를 횡령한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청년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이시영 선생은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부통령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이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적 비극에 대해 최고위직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는 '책임의 눈물'이었다. 이처럼 그의 삶을 관통하는 세 가지 눈물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우리 근현대사가 겪어야 했던 아픔과 나아가야 할 길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